찬열이 바닥으로 완전히 추락하기 전에 간신히 받쳐든 세훈이 낑낑거리며 찬열을 벽에 기대앉혔다. 그게 무슨 힘들 일이랴 싶었지만, 찬열의 키와 뼈대가 있었던치라 찬열을 조금만 이동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벅차는 기분이었다. 기절한 찬열의 앞에 쭈구려 앉은 세훈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익숙한 이름을 찾자, 그대로 통화버튼을 누르고서는 귀에 가져다댄다. 신호음 두 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세훈이 바로 시원스레 말한다.
"어, 5분정도 뒤면 도착할거에요. 곧 갈거니까 그만 자고 준비하구."
제 할말을 전달한 세훈이 상대방의 답을 듣자 즉시 전화를 끊어 이번에는 연락처에서 다른 사람을 찾았다. 스크롤을 몇 번 밑으로 내리자 찾던 연락처가 화면에 떠올랐다. [안받아도 되는 번호].
이번에도 똑같이 전화를 건 세훈이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뚜르르, 뚜르르르-.
단조로운 통화연결음이 지금 이 순간에는 듣기좋은 멜로디처럼 들려 세훈이 턱을 괸 채 잠에 빠져있는 찬열을 바라보았다. 으아, 개존잘. 너무 제 타입이어서 세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때, 핸드폰 저편에서 지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너 어디야?!
"그건 알거 없고여. 나 이제 갈 거니까, 형이 알아서 해줘요."
- 뭐?
앞뒤 설명은 다 잘라먹은 채, 쌍싸가지와 더불어 뜬금없는 말을 내뱉자 상대방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세훈은 여전히 찬열을 보고 주체못하는 입꼬리를 한 채 다시 말했다.
"나 이제 갈 거니까, 스탭들이랑 배우들에게 전해달라고여. 오세훈이 급한 일이 생겨서 갔다고."
제멋대로 말하는 세훈에 화난 건지 상대방이 빽 소리를 지른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큰 소리에 귀가 아팠는지 세훈이 인상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귓가에서 조금 떼어냈다. 그래도 여전히 쏘아붙이는 모양은 거세다. 핸드폰이 터질 지경이었다. 세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내가 잔소리 시어머니라고 하지. 하여튼 지금 가야 한다. 더 이상 말을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세훈이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하고선 입을 열었다.
"백현이 형, 이번 달 월급 안 받고 싶어요?"
- 가 얼마나..!...어?
월급이라는 단어에 소리치던 변백현이 말을 멈추자 세훈이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 돈이 안 중요하면 그럴 수도 있져. 아, 새로운 매니저 찾아봐야겠다. 형이랑 그간 정이 있는데, 어쩔 수 없죠. 그동안 즐거웠어요. 세훈이 금방이라도 잘라버릴 듯한 발언을 내뱉자 백현이 당황해서 소리를 쳐댔다. 야야야, 오세훈! 그건 아니지!! 내가 니 뒤치다꺼리 얼마나 한 줄 알면 그런 말이 존나 나오냐!!!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 담긴 백현의 목소리에 세훈이 깔깔거리며 내뱉었다.
"알죠, 얼마나 수고하는지. 그러니까, 한번 더 수고해줘요. 안녕!"
- 어? 야,야! 오세후...!
뚜욱.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세훈이 핸드폰을 다시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저래도 백현은 곧 체념하고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말 둘러대는 거에는 전문가니 말이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세훈 자신의 기준에서 말이다- 이렇게 자신이 제멋대로 굴 때가 종종 있었던지라, 변백현은 이미 면역이 다 되어 있었다. 그게 익숙해져 있다는 것은 불쌍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세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어떻게 가져갈까 했는데 왠 횡재야."
세훈이 꽃받침을 한 채 찬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박찬열을 이번 촬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저걸 어떻게 살살 구슬려서 가져가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세훈이 뒤에 널부러져 있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감히 내가 찜해놓은 거에 달려들다니, 아주 간이 자유를 갈구하다 못해 제멋대로 배 밖으로 뛰쳐나온 놈이었다. 이대로 확 땅속에 파묻어버려? 찰나동안 고민했던 세훈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찬열을 바라본다. 과정이야 어찌됬든지간에, 하여튼 저 새끼 덕분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걸린 시간이 짧아진 건 사실이다. 그냥 이번만은 봐주지, 뭐. 세훈이 너그럽게 마음먹곤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역시 난 너무 착해."
세훈이 손가락을 뻗어 찬열의 볼을 쿡 하고 눌렀다. 마치 잘 빚어진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신한 거 같아 기분이 묘했다. 완전 제 타입이다. 세훈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 정도다. 눈을 떠고 멋있게 돌아다니는 모습은 더 좋다. 빨리 가져가야지. 세훈이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찬열의 머리카락을 부비적거렸다. 이제 잠에 빠져든 찬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상한 연애
박찬열 X 오세훈
02
으음. 찬열이 감긴 눈을 뜨려 애를 썼다. 그러나 마치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도 된 듯, 생각대로 잘 떠지지 않았다. 간신히 눈꺼풀을 뗀, 그러나 완전히 뜨지는 않은 채로 찬열이 주변을 살피려 애썼다. 흐릿하게 보이는 사물들이 마치 눈앞을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듯하다가, 몇 번 깜박이자 그제서야 춤추는 걸 멈추곤 제 자리에 머물렀다.
등에 닿는 푹신한 감촉. 편하게 팔을 받쳐주고 있는 팔걸이. 그리고 옆에서 저를 보고 싱글 웃고 있는 오세훈. 어? 찬열이 살풋 미간을 좁혔다. 오세훈? 오세훈이 왜 내 옆에 앉아있는 거지. 그럴 일이 없는데.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응, 꿈이에여."
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찬열이 다시 세훈을 바라보았다. 꿈이라고? 아, 꿈이구나. 찬열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세훈이 저에게 음료를 건넨다. 자, 마셔여. 순순히 세훈에게서 음료를 건네받은 찬열이 물끄러미 손에 든 병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말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찬열이 주저없이 안에 든 음료를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의 느낌이 생생하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감이 있는데. 찬열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꿈이라고?"
"정답."
예쁘게 웃으며 말하는 세훈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다. 정말 꿈인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뭐 꿈이라고 하니, 꿈이겠지 뭐. 깊게 생각하기 싫어 대충 넘겨버린 찬열이 다시 등을 깊숙히 파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아까 있었던 일은 다 꿈인 거였어. 피곤한 뒷풀이에 나간 것도, 이상한 시인 변태가 달라붙은 것도.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져 찬열이 푸시식 웃었다. 근데, 꿈인데 왜 이렇게 졸리지. 찬열이 크게 한 번 하품을 했다. 꿈속에서도 또 잘 수 있나....? 아마 꿈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또 자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찬열이 다시 하품하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너무 졸린걸.....
다시 잠에 빠져드는 찬열을 보고 세훈이 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좀 전에 찬열에게 건네주었던 음료수병을 집어들곤 중얼거렸다. 음, 약 효과가 쎄긴 쎄군. 이렇게까지 빨리 돌다니. 그래도 뭐 일단 고비는 넘겼다.
"중간에 깨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꿈이라는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잠든 찬열이 너무 다행이었다. 세훈이 양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자고있는 찬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실 잠든 찬열을 얌전히 바라보는 것보다는 깨어서 돌아다니는 찬열을 보는 게 좀 더 취향에 맞는다. 아무말없이 곤히 자는 상대를 계속 보는 건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다. 우째 저리 제 취향일꼬. 세훈이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지금 이런 세훈의 모습을 보면 아마 수많은 팬들의 환상이 와장창 깨질 것이 분명했다. 완벽한 미남, 완벽주의자 그 자체인 오세훈이 저런 이상한 얼굴을 해 보이다니. 눈을 양손으로 북북 문질러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나 확인하려고 들 것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에서는 그런 팬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있긴 했지만 찬열은 약에 취해 잠들어있는 상태였고, 나머지는 다 제 사람들이라 그런 것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세훈은 마음놓고 찬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입을 헤 벌리고 계속 찬열을 감상하는 바람에 입에서 침이 흐르자 세훈은 재빨리 닦아 평소처럼 반듯한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고있는 찬열을 보자 또 입이 자동적으로 벌어진다.
"끄응...."
한동안 찬열을 바라보기만 하던 세훈이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안타까운 신음성을 흘렸다. 이 망할 비행기는 왜 이렇게 빨리 안 가는 걸까. 그리고 창문 덮개를 열어 밑을 내려다본다. 보이는 건 구름뿐이라 앞으로 가야 할 거리가 얼만큼 남았는지 가늠할 수 없어 세훈은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빨리 가서 찐하게 놀고 싶은데. 박찬열을 장난감 정도로 취급한 세훈이 즐거운 얼굴로 의자를 가볍게 찼다.
"...헉!!"
찬열이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 밖으로 뛰쳐나올것처럼 쿵쾅쿵쾅댔다. 찬열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산소가 입 안으로 들락날락 할 때마다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조금씩 가라앉고, 상황판단이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후우. 찬열이 머리를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은 꿈이었나 보다. 아직까지 널뛰기를 해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끔찍한 꿈속에서 한 여자가 저를 침대위에 꽁꽁 묶어놓고선 전혀 보고싶지도 않은 스트립쇼를 보여주었다. 그래, 여체는 그래도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몸만 여자지, 얼굴은 아까 화장실에서 저에게 달려들었던 남자 변태의 얼굴이었던 게 문제였다.
그것만 해도 보는 눈이 썩을 지경이었는데, 한술 더 떠 변태가 점점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알몸인 상태 그대로 말이다. 씨발, 진짜 미쳐서 돌아가신다는 게 어떤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다시 그 장면을 상기하니 소름이 오소소 몸에 돋아올라왔다. 다행히 손을 뻗는 순간 잠에서 깼기에 망정이지, 만일 잠에서 깨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어떠한 꿈을 꾸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찬열이 팔에 돋은 소름을 벅벅 긁어댔다. 그건 그렇고, 이건 뭐람. 문득 눈에 들어온 이불이 제가 쓰는 이불이 아니자 찬열이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굳었다. 여긴 어디?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자신은 남자 혼자 사는 집답게 별로 꾸미지도 않았으며 살기에 필수적인 몇 개만 깔아놓은 방이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필수적인 것 몇 개도 없긴 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건 무엇인가. 제가 쓰던 침대는 어디가고 하얗고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 앉아있으며, 깨끗함이 묻어나는 벽들과 카페트가 깔린 바닥, 불을 키면 은은한 빛을 낼 조명들, 기타등등이 있단 말이냐. 그리고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사실은 제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제 집보다 두 배는 더 큰 것 같았던 것이다.
분명히 방이 맞는거 같은데, 집 저리가라 할 정도로 크다. 대체 여긴 어디? 찬열이 잠시 상황판단을 하려고 애를 썼다. 이것도 꿈인가? 그래, 가능하다. 꿈속의 꿈일수도 있지. 찬열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 뺨을 있는 힘껏 세게 쳤다.
그리고.
"이런 ㅆ..."
찬열이 뺨을 문지르며 작게 욕을 했다. 괜히 있는 힘껏 쳤다. 좀 힘을 뺄걸. 얼얼한 볼따구에서 열이 몽실몽실 올라오는 느낌에 찬열이 인상을 구겼다. 하여튼, 덕분에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니란 것은 잘 알았다. 현실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된거냐. 찬열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왜 지금 자신이 이 곳에 있는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뒷풀이, 변태, 오세훈, 변태 사망, 저를 때려 기절시킨 오세훈.....기절...기절... 음? 찬열의 눈이 크게 커졌다. 잠깐, 생각해보니 변태가 세훈에게 K.O.를 당한 후 오세훈이 저를 때려서 기절시킨것 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생각나는 건 세훈의 얼굴이었는데. 싱글 웃는 낯으로 저에게 음료를 건네주던 오세훈. 그건 꿈이 아니었나? 꿈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찬열이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면 절 이 낯선 곳으로 데려다놓은 장본인은 오세훈이란 말인가? 도대체 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찬열이 끙끙거렸다. 정황상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둔 범인은 오세훈이 맞는 듯 한데, 자신을 납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세훈은 부러울 것 없이 다 가진 사람이고,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길 데려와서 무슨 이득을 보겠는가. 찬열이 한참 추리를 해보다 일단 중요한 것을 생각했다.
그래, 일단 이 방을 나가고 보자. 정말 오세훈이 저를 납치했든 아니든 간에 상황을 알아보려면 여기를 나가야 될 것 아닌가. 그렇게 결론내린 찬열이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려 발을 디디려고 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바로 밑을 쳐다보던 찬열이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었다.
"......."
너무 놀라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찬열이 더이상 커질 것도 없는 눈동자로 밑에서 잠복하고 있던 사람을 주시했다. 베일듯 높게 솟은 콧날, 똑같은 색으로 염색하더라도 같은 느낌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독특한 머리카락, 희고 고운 잡티하나 없는 피부. 오세훈이 있었다.
찬열이 숨을 멈춘 상태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눈을 감고있던 세훈이 번쩍 눈을 뜨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시 찬열이 크게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훈은 멍하니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꾸벅, 하곤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도로 잠든 것 마냥 말이다.
세훈이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멈추자 간신히 숨을 다시 쉴 수 있게 된 찬열이 간헐적으로 기침을 토해냈다. 진짜, 너무 놀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심장마비로 죽을뻔 했다. 숨을 쉴 수 있는 게 이렇게 감사한 것이었다니.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감사하며 찬열은 이제 꼼짝않고 있는 세훈을 바라보았다.
어쩔까? 한 번 건드려볼까?
조금 전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어 찬열은 조금 주저하고 있었다. 자신을 여기로 데려다놓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주 유력한 후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냥 간다면 아주 후회할지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찬열이 세훈을 톡 쳤다. 아까 그 꼴이 날 까봐 아주 살짝, 손끝으로 말이다.
"....흐으."
조그만 건드림에도 반응을 보인 세훈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잠시 머리를 흔들거리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열은 그런 세훈의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든 세훈이 눈을 천천히 떴다. 곧이어 흑요석을 박아넣은 듯한 검은 눈동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신이 내려준 눈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해대는 눈동자다. 눈을 뜬 세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찬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활짝 웃었다. 아주 활짝, 웃는 순간 얼었던 세계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 미소에 반사적으로 넋을 잃은 찬열이 멍하니 세훈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자신을 놀래킨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채로.
"박찬열이당."
짧은 말을 내뱉은 세훈이 두 팔을 뻗고 찬열에게 다이빙했다. 그 바람에 뒤로 넘어간 찬열이 버둥거렸다. 이, 이것좀 놔봐요! 당황한 찬열이 소리치며 세훈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보통 남자의 힘을 웃도는 찬열조차 쉽게 뗄 수 없었다. 간신히 팔을 잡고 떼어낸 찬열이 세훈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좀 비켜주실래요?"
"왜여?"
왜라니. 더러운 성질이 나올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찬열이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설명했다. 무겁거든요, 그쪽. 단호한 찬열의 말에 세훈이 순순히 비켜준다. 세훈이 순순히 떨어져주자 찬열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제 말을 깡그리 무시할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보다.
몸을 일으킨 찬열이 옆에 앉아있는 세훈을 바라본다. 연신 웃는 낯을 하고 있어서인지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찬열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정돈하고 다시 세훈을 쳐다보았다. U자를 엎어놓은 모양을 한 눈으로 저를 보고 웃는 모양을 보자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납치니 뭐니 심각한 일을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쨌든 궁금증을 풀어야 했기에 찬열은 입을 열어 세훈에게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그쪽이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건가요?"
"네."
"왜죠? 아니, 그전에 여기는 어딘데요?"
"내 집이여."
"...왜 제가 세훈씨 집에 있는 거죠?"
지극히도 간결하고 명료한 대답에 찬열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자신은 저쪽이 납치범이라는 것을 알고도 최대한의 예의를 차리면서 물어보고 있는 반면에 오세훈은 단답이었다.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참자, 참자.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찬열이 속으로 참을 인 자를 한 번 새겼다.
"그야 애인인데 내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있고, 뭐 그런거 아니에여? 그래서 델꾸 온 건데."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 당당한 대답에 찬열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했다. '애인'이라니. 분명 저 단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단어다. 자신과 오세훈의 관계를 한 단어로 굳이 정의하자면 '신고'일 텐데. 뭘 어떻게 잘못들었길래 '애인'이라는 단어로 들린 걸까. 찬열이 재차 물었다.
"뭐라고요?"
"애인이라고여."
"내가, 그쪽이랑?"
"응, 사귀는 사이라고요."
세훈이 예쁘게 웃었다. 허어? 찬열이 뒷목을 짚었다. 저건 또 무슨 닭이 스스로 후라이드치킨이 되는 소리람.
찬열이 세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쯤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오세훈이 맞는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살짝 미친놈이 오세훈으로 분장하고 대신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분장으로서는 저렇게 세훈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 수 없다. 외모부터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니다, 저런 건. 찬열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오세훈이 맞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살짝 맛이 간게 아닐까? 뭐 그럴 수 있잖아, 수많은 기자들과 사생활 침해에 시달려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언제부터 그쪽이랑 사귀는 사이가 됐지?"
맛간 세훈을 상대로 곱게 말이 나갈리 없다. 짜증을 가득 실어담은 찬열이 비딱하게 앉은 채로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세훈의 눈이 더욱 반짝거렸다. 찬열이 미간을 구겼다. 제 말 따위는 깨끗이 무시한 세훈이 민망할 정도로 저를 쳐다본다. 순간 욱한 찬열이 다시 쏘아붙였다.
"저기, 내 질문에 대답 좀 할래?!"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건지 세훈의 눈빛이 평상시 -비록 찬열은 세훈을 전에 두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의 눈으로 돌아왔다. 세훈이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리를 꼬았다.
"그야 화장실에서 말했잖아여? 우리는 교제하는 사이라고."
"하? 그거야 임기응변인거고!"
"그때부터 넌 내 꺼, 난 니 꺼."
손가락으로 번갈아가며 친절히 니꺼내꺼를 연발하고 있는 세훈을 보고 있자니 절로 혈압이 올랐다. 찬열이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두 번 새겼다. 미안한데요, 내가 싫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하시고 여기서 내보내주면 고맙겠다.
"싫은데여? 안 보내줄거야."
얄밉게 말하는 세훈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을 것는 것 같다. 참자, 참자. 찬열이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겼다. 이제 더 이상 건들면 어찌되도 모른다. 자신은 잘못 없다. 옛 선조들이 말하는 참을 인자를 세 번 새겼으니 될대로 되라지. 이제까지 자신의 인내심은 넓은 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이건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화를 겨우 참은 찬열이 뭐라 말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을 때였다.
"뭐...!"
갑자기 자신의 목을 껴안고 엎어지는 세훈의 행동에 찬열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두 팔을 뻗어 간신히 지탱했다. 누가 들어와서 본다면 찬열이 세훈을 덮치려는 듯한 자세다.
세훈이 찬열의 목에 팔을 두른 바람에 두 사람이 얼굴은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민망한 기분에 찬열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나치게 미인인 세훈의 얼굴은 눈에 잘 들어왔다. 피부는 자체발광하는 듯 반짝반짝거리고, 점도 없고 주근깨도 없다. 마치 새하얀 도자기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보니....정말 신이 직접 공들여 만들었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사람을 홀려버릴 듯한 마력이 풍겨져나오는 듯하다. 그리고 실타래같은 머리카락. 평범한 남자들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흘끗 보기만 해도 엄청 좋은 머릿결을 가진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신비스러운 색까지 더한다면. 그러나 찬열의 생각은 들려오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우리 섹스하자."
상큼한 목소리와는 달리 민망한 내용에 찬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분명히 제 눈앞에 있는 오세훈은 대단한 미인이고 뭇 수많은 여자들 -또는 게이들- 의 이상형이라곤 하긴 한다만, 자신은 아니다. 찬열은 아주 진지하게 다시 세훈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진짜 맛 간게 확실한 것 같았다. 좀전의 발언으로 의심이었던 생각이 확실하게 굳어졌다.
"잠시만 이것 좀 떼어주실래? 정신병원에 전화 좀 하게."
"싫어여."
찬열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훈이 계속 종알거린다. 나랑 자요, 어차피 애인인데 뭘 못해? 나 잘하는뎅. 되게 기분좋을 걸요? 지껄여대는 세훈의 말에 찬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변태가 달라붙었다, 좆되기 전에 떼어내야 한다.
찬열의 머릿속에 두 가지의 생각이 자리잡았다. 찬열이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훈도 만만치 않았다. 찬열이 몸을 일으키자 찬열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곤 양 다리로 찬열의 허리를 감쌌다. 그 바람에 좀전보다 세훈이 더 달라붙어있게 되자, 찬열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만큼 큰 남자를 달고 있으려니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찬열이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떨어져, 좀 떨어지라고! 찬열이 안간힘을 쓰며 세훈을 떼어내려 했지만 세훈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이런 상황에저마저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싱글싱글 웃던 세훈이 찬열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선 혀를 내밀어 찬열을 핥았다. 싸한 느낌에 찬열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소름이 와닥닥 돋는다. 아까전에 꾼 꿈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듯하다. 찬열이 좀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미친놈아, 제발 떨어져!!!!"
"흐흥~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뎅~"
뭔 개소리야 씨발!!!
찬열이 울듯한 기분으로 세훈의 등을 퍽퍽 때렸다. 지금 이 순간에 세훈의 몸값이 수십억을 오가는 것도, 대단한 유명인사인 것조차 관계없었다. 일단 이 미친놈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찬열이 떨어지지 않는 세훈의 몸을 붙잡고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비틀거렸다. 아, 망할.... 뒤로 휘청 기우는 느낌에 찬열이 질린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아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기 때문에 찬열은 신음을 낼 수 없었다.
"야, 오세훈!!!! 너 이 자시.....!"
갑자기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의문의 남자도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방 안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찬열의 위로 엎어진 세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찐한 키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 대신, 방안에서는 쪽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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