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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찬세백] 향기의 각성 下

선택받은 사람에게는 제각기 고유한 체향이 존재한다. 피어나는 꽃처럼 보드라운 향, 시원한 바람처럼 조금 차가운 향, 이슬에 젖은 풀잎을 닮은 향 등등.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홀리는 듯한 체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황홀한 장미향을 풍기는 오세훈.

원래 미약했던 세훈의 향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치명적이고 짙게 피어올랐으며 그 때문에 세훈에게 다가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쳐내는 자들이 두 명 있었으니 그건 바로 변백현과 박찬열이었다. 웃으면서 세훈에게 접근하는 손들을 냉정하게 쳐내는 변백현과,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세훈이 관련된 일이라면 싸늘해지고 차가워지는 박찬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오세훈의 주변 멀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오묘한 장미향. 사실, 오세훈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은 딱 꼬집어서 장미향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신기한 향기, 다른 두 사람의 향기가 섞여서 새롭게 피어난 체향. 변백현과 박찬열, 세훈은 그 두 사람 사이의 애매한 줄다리 위에 서 있었다.



세훈은 백현이나 찬열과 같이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단순히 잠만 같이 잔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적인 의미로였다. 세훈은 이 복잡한 관계의 시작을 알고 있었다. 오세훈은 20년이 넘도록 자신이 열성 알파라고만 생각해왔다. 알파와 베타, 혹은 오메가를 구별하는 성향 테스트가 틀릴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세훈은 다른 알파들과 다르게 발정기가 온 적은 없었다. 그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세훈은 딱히 성욕이 없었고, 솔직히 귀찮기만 할 발정기가 오지 않았기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틀어진 것은 대학교 2학년이 되고나서였다.

언제부턴가 이유없이 몸이 무겁고 입맛이 없었다. 잠을 푹 자도 피곤했으며 몸에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니겠거니 했지만 계속해서 지치는 몸에 일상이 짜증났다. 그리고 가끔씩, 저에게 말을 거는 찬열이 낯설게 보였다. 힘이 없고 시력까지 저하되는 듯한 시기가 약 한달가량 이어졌을 때였다. 박찬열과 과제하러 힘겨운 몸을 이끌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세훈은, 그 날 밤 새로운 형질을 발현했다.

 

 

'나,좀,살려,줘..찬열아.'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을 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던 세훈에게는 저를 붙들어 줄 수 있는 강한 알파가 절실히 필요했다. 때마침 자신을 찾아나온 찬열을, 세훈은 본능적으로 끌어당겼다. 정신없던 밤을 보내고 난 후 세훈은 종종 찬열과 붙어다녔다. 박찬열에게서 흘러나오는 체향이 좋았다. 저를 부드럽게 배려하고 키스해주는 박찬열이 좋았으며, 따뜻한 체온이 좋았다. 비록 입 밖으로 사귀자는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서로에게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그런 의미있는 존재.

그 두 명 사이에 끼어든 건 또다른 알파인 변백현이었다.

 

 

찬열과 세훈의 사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백현은 어느 날 세훈의 자취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던 세훈을 짓눌렀다. 네가 오메가였냐고, 박찬열이랑 얼마나 많이 잤냐, 고. 발정난 오메가새끼라며 백현은 말로 한없이 세훈을 깎아내렸다. 그리고 세훈을 억지로 안으려 했으나 때마침 들어온 박찬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백현의 밑에 깔려있는 세훈을 보고 화가 난 찬열이 백현의 멱살을 붙들고 한바탕 싸우고 난 뒤 그들의 사이는 한동안 소원해졌다. 세훈도 억지로 절 깔려고 했던 백현이 무서워서 일부러 피해다녔다.

나는 안 되는데, 왜 쟤는 돼.


참다참다 터져버린 백현이 흉흉한 기색으로 절 피하려는 세훈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너, 왜 나 피하냐. 내가 무섭냐?"


왜 박찬열은 보고 나는 안 보는데? 백현이 사납게 씹어뱉었다. 잘 봐, 네가 나에게 매달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백현이 세훈을 짓눌렀다. 애초부터 오메가인 세훈은 우성알파인 백현을 진심으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훈은 백현과 관계를 가졌다. 장담대로 세훈은 백현에게 울며 매달렸다. 느끼는 곳만을 찔러대는 백현의 몸짓에, 잠식하는 엄청난 쾌감에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좋아? 좋지? 백현이 달뜬 숨으로 계속해서 물었다. 대답해, 오세훈. 억지로 안긴 것인데 기분은 더 좋았다. 세훈이 멍하니 생각했다. 찬열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다른 게 백현한테 있었다.



세훈은 백현에게도 손을 뻗었다. 애매하게 이어진 세 사람과의 관계. 다시, 세 사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예전처럼 같이 다니게 되었다. 심심하면 장난을 치고, 좀 세게 때리기도 하고. 백현은 찬열을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예전과 같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오세훈에게 손을 대되, 독점하지는 않는 조건.

 

*

 

아 진짜 졸려 죽겠다.

세훈이 지루한 교양수업을 들으며 생각했다. 진짜, 오늘은 해도해도 너무했다.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교수의 목소리에 저절로 잠이 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입에서 수면제를 발사하는 것 같아... 세훈이 제대로 눈을 뜨려 애쓰려다가 결국 포기하고서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백현의 핸드폰을 스윽 가져갔다. 제 것마냥 가져가는 세훈의 행동에 백현이 쯧 하고 쳐를 차곤 착실한 우등생 연기를 이어나갔다.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세훈이 백현을 흘겼다. 맨날 자다가 딱 오늘 하루만 일어난 주제에 누굴 보고 혀를 차?

세훈이 잠겨있는 화면을 보고 패턴을 그렸다. 배경화면이 나타나자 세훈이 익숙하게 카톡창을 들어가 한 사람을 찾았다. 세훈이 앞 사람의 등을 방패 삼아 아예 편하게 옆으로 엎드리고서는 손가락만을 움직여 카톡을 보냈다.


[끝남?]

백현이 카톡을 하는 세훈을 쳐다보았다. 토토독, 빠르게 움직이는 세훈의 손을 바라보던 백현의 시선이 살짝 드러난 세훈의 목으로 향했다. 흐응, 백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오세훈의 목에 발갛게 찍혀있는 키스마크. 저 자국을 남긴 주인이 누군지 백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 오세훈이 카톡을 하고 있는 박찬열이겠지.

박찬열은 저렇게 가끔 눈에 띄이는 데 자국을 남겨놓곤 했다. 자신이 더 빨리 오세훈을 가져봤으니, 주도권도 조금 더 많이 가지겠다는 심산인가? 백현이 가볍게 생각했다. 별 자극거리도 안 되긴 한다. 테크닉은 제 쪽이 몇 수 위일 테니깐 말이다. 세훈이 눈을 깜박이다가 박찬열에게서 대답이 오자 다시 카톡방으로 들어갔다. 

 

[오세훈 너야?] [왜 변백현 거 써.]

[내 거 꺼내기 귀찮아. 강의중?]

[지금 쉬는시간]

 

그것까지 본 백현이 세훈에게서 제 핸드폰을 뺏었다. 아, 왜 뺏어? 세훈이 눈을 치켜올렸다. 백현이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내 배터리 아까우니까 니꺼 써라. 치사한 백현의 발언에 세훈이 허 하고서는 손사래를 쳤다. 치사해서 안 쓴다, 안 써. 그와중에도 백현의 핸드폰에서는 착실히 카톡이 오고 있었다. 날아오는 카톡메세지를 읽다가 백현은 딱 한글자만을 보냈다.


[ㅗ]

[뭐야 변백이냐]

[ㅇ]

백현의 초단답형에 찬열이 그대로 읽씹했다. 백현이 미련없이 핸드폰 화면을 껐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오세훈이 슬슬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야, 이젠 자려고?"


백현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자 세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슬금슬금 자세를 추리고는 정말 조용하게 잠자기 시작했다. 허어, 백현이 눈썹을 올렸다. 괜히 심술이 난 백현이 툭툭 쳤다. 야, 일어나. 세훈이 눈도 뜨지 않은채 가운뎃손가락을 살포시 날려보냈다. 이게 진짜. 백현은 오세훈이 단 한숨도 잘 수 없게 계속 괴롭혀볼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이어지는 강의에 그 생각은 고이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그래, 이건 잠을 자는 게 더 효율적이겠군. 백현이 세훈을 따라 책상에 엎드렸다.

 


흐암. 세훈이 강의실을 걸어나오며 작게 하품을 했다. 빨리빨리 좀 챙기고 나와, 굼벵이같이 느려터졌네. 먼저 강의실 문 밖으로 나가있던 백현이 못마땅하게 내뱉었다. 넌 또 언제 그렇게 빨리나갔어? 세훈이 백현을 따라 걸었다. 순간이동 한 줄 알았네.

강의가 끝나는 시간이라 계단과 복도에 이동하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3층, 2층, 1층.. 계단을 내려가던 세훈이 발을 돌렸다.

"나 화장실좀."

"왜? 이따 가."


백현이 귀찮다는 어투로 말했다. 세훈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귀찮으면 먼저 가 있던가, 손이 찐득거려서 씻어야돼. 뭐 그럼. 백현이 순순히 세훈을 따라갔다. 얜 또 왜이래? 세훈이 인상을 구겼다. 귀찮은 짓을 사서 할 변백현이 아닌데. 세훈은 조금 미심쩍었지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쏴아아, 수도꼭지를 튼 세훈이 찐득거리는 손을 씻어냈다. 백현은 세훈의 벽에 몸을 편히 기댄 채 그런 오세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씻으려 몸을 숙이니 세훈의 목덜미가 더 드러나 키스마크가 잘 보이고 있었다. 백현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조금 거슬린다, 왠지 박찬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거 좀 짜증나네, 백현이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세훈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다음부터는 그냥 음료수 말고 물을 마셔야겠다. 세훈이 속으로 다짐했던 차였다. 스윽, 갑자기 제 뒷목에 얼굴을 묻는 백현의 행동 때문에 세훈이 움칠거렸다. 야, 지금 뭐....읏. 세훈이 신음을 삼키며, 잠그려고 했던 수도꼭지를 더 세게 틀었다. 쏴아아아, 흘러내리는 물소리 사이로 세훈의 신음이 섞여나갔다. 야, 그..,하지...마!

벗어나려는 세훈의 몸을 강하게 붙잡고 백현이 남아있는 키스마크에 입을 댔다. 그리고, 힘을 주어 살짝 깨물었다. 세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따끔한 감각 후에 밀려오는 야릇한 혀의 움직임에 세훈이 결국 팔꿈치로 백현을 쳤다. 이번에는 제 뜻대로 떨어져나간 백현을 보고 세훈이 방금 전 백현이 핥은 곳을 매만지며 약간 짜증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너 미쳤어?"

"영역 표시."



백현이 제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당혹스러운 세훈의 표정을 여유롭게 즐기던 백현이 다시 몸을 기울였다. 또 당할까봐 몸을 뒤로 뺀 세훈을 무심하게 지나쳐 아직까지도 물이 콸콸 나오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근 백현이 툭 던졌다. 왜 혼자서 난리야? 그 말에 세훈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백현의 눈이 재차 세훈의 목으로 향했다. 선명하게 자리잡은 이제 자신이 오세훈에게 남긴 키스마크가 이제 썩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백현이 세훈의 엉덩이를 주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세훈이 백현의 손을 쳐내며 질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변태새끼."

세훈이 휙 몸을 돌려 화장실을 나갔다. 저런 반응도 매번 볼때마다 신선해서 좋네, 백현이 뒤따라나가며 생각했다.

 
 



"그래서, 넌 뭐할 건데?"

"뭐가."

백현이 도로 물었다. 세훈이 대답했다. 너 공강이잖아. 백현이 맥주캔을 뽕 따며 이어받았다. 뭐 그냥 있지 뭐. 지금 나 걱정하냐? 난 너랑 달리 아싸가 아니라서 충분히 바쁘니까 신경 꺼도 돼. 지랄을 한다, 세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난 간다."

"그럼 나도."

백현이 세훈을 따라서 일어났다. 세훈이 그런 백현을 흘겨보았다. 바쁘다면서 왜 날 따라오는데? 백현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뭐가? 나도 상대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것 뿐이거든? 쓰레기 버려야 되니깐. 백현이 어느 새 다 마신 맥주캔을 흔들어보였다. 저건 또 언제 다 마신 거야. 세훈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상대앞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조금 많아져 있었다. 종종종 걸어들어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세훈이 저 쪽에서 걸어오는 찬열을 보고 그를 불렀다.



"박찬열!"



이제 막 학교에 도착한 건지 교정 쪽에서 걸어오던 찬열이 손을 마주 들었다. 저거저거, 또 저렇게 실실 웃지. 백현이 가늘게 눈을 뜨곤 박찬열을 바라보았다. 너 공강이지? 부럽다. 찬열의 말에 백현이 내뱉었다. 웃겨, 넌 지금 왔잖아. 그건 그렇지. 세 사람이 상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찬열과 세훈이 서로 뭐라고 말을 주고받으며 위층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백현이 휴게실로 들어갔다.


분리수거통에 캔을 던져넣은 백현이 문득 자판기를 쳐다보았다. 다 품절이네, 여기는 잘 안 바꾼단 말이야. 다행히 방금 맥주를 마셔서 자판기를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백현은 불평을 표했다. 짧게 끊어진 진동음에 백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데이터 없는 친구놈이 데이터좀 선물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에 백현은 도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디를 갈까. 백현이 가만히 생각하며 휴게실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저기 뒤에서, 발목을 잡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걔 말이야, 걔. 오세훈.



"좀 귀엽지 않아?"

"걔가 귀엽다고? 아서라 아서. 눈만 봐도 무섭던데."

"그렇긴 한데, 웃을 때 귀엽긴 하더라."

"그보다는 난 걔랑 자주 다니는 변백현? 그 쪽이 더 좋아."



마신 음료수를 탁상 위에 내려놓으며 단발머리 여자애가 덧붙였다. 강아지 닮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꽤 남자답고. 딱 남친의 표준 같다고. 맞아, 모범적인 남자친구의 예지. 다른 친구가 맞장구쳤다. 근데 나는 오세훈 쪽이 더 눈이 가. 그지?

"걘 뭔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니까."

긴머리 여자애가 동의했다. 너네 오세훈에게서 나는 향 맡아봤어? 여자가 말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향기야, 남자애가 장미향이 잘 어울리다는 게 신기하다니까? 단발머리 여자가 핀잔을 주었다. 몇번을 말했잖아, 우리는 너랑 달라서 못 맡는다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긴, 너랑 같은 다른 애들 말 들어보면 향기가 진짜 끝내주긴 한다더라. 여자가 소근거렸다. 완전히 장미향은 아니래. 그래서 더 눈이 가더랬나? 그런 향 때문에 섹시하게 보인다고 하더라. 여자가 웃었다. 맞아, 진짜 그렇긴 해. 향이, ... 그렇거든.



"사람을 유혹하는 향이랄까..."



백현이 우뚝, 멈춰 섰다. 여자애들 세 명이 수다떨고 있는 곳으로 걸어간 백현이 그 앞에 떡하니 섰다. 누군가가 다가온 기척에 말하고 있던 여자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흡, 여자가 숨을 삼켰다. 어떠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눈동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현의 체향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일렁이는 것 같아서, 여자는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다른 두 명의 일반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친구가 말을 멈춘 채 떨고 있자 고개를 돌린 그녀들은 백현이 옆에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세훈이 뭐?"



백현이 씹어뱉었다. 귀가 간질거린다 싶더니 뒤에서 이런 말을 하고들 있는 거였어?

백현이 눈으로 그녀들을 흝었다. 다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백현이 세훈의 향에 대해 말하던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선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런 거 말하고 싶으면 그냥 속으로만 생각해, 알겠냐? 오세훈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란 말이야, 알아들어?"

백현이 이를 갈며 경고했다. 큰 소리에 휴게실에 있던 시선들이 네 명에게로 쏠렸다. 여자가 히끅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 같은 또래의 남자애라고는 전혀 생각 못할정도로 무서웠다. 백현이 츳 혀를 차고서는 다른 두 명의 여자들을 노려보았다. 하여튼 말만 많아, 백현이 중얼거리고서는 거칠게 휴게실을 나갔다. 나가버린 백현의 뒤로 세 명의 여자들이 손을 떨었다. 뭐야, 방금 왜 그런 거야? 우리가 오세훈 이야기 해서 그런 거야? 대답이 없는 의문들만이 송송 울려져졌다.



하여튼 오세훈 저런 일에 구설수 오르는 건 잘하지.


백현이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오세훈의 매혹적인 체향이 다른사람에게도 똑같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니 짜증났다. 분명히 맡기 좋지는 하지만, 사람들을 홀려버린다면 그런 체향따위 없는게 더 나을텐데. 백현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괜히 짜증난 기분에 백현이 화풀이할 데를 찾았다.

[야 적당히 해]

박찬열이라고 뜬 카톡방에다가 메세지를 보냈다. 밑도끝도없는 메세지였지만 박찬열은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백현이 화면을 껐다.


*

 

조그만 자취방에 있는 네모난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있는 세 명. 백현과 찬열, 그리고 세훈 이렇게 세 사람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조별과제였다. 컴퓨터를 켜서 자료를 더 찾아보고 있던 세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세훈이 화를 내며 마우스를 내던졌다. 왜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냐, 세훈이 다른 두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샤프 끝을 입에 물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있던 찬열이 세훈의 시선에 눈을 들고 물어왔다. 

 

 

"잘 안 돼?"

"완전 거지야. 넌?"

 

 

찬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양반다리를 한 채 뽑아놓은 자료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백현의 얼굴 또한 종잇장처럼 꾸깃꾸깃 구겨져가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 답이 없는데? 이거 제출기한이 언제까지였지?"

"다음주 화요일."

​"아 젠장, 시간도 별로 없잖아."

백현이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세훈이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저번주부터 빨리 하자고 했잖아, 그걸 씹으신 게 누구더라? 누군 이렇게까지 거지일 줄 알았겠어? 백현이 되받아쳤다. 야 내 머리에서 김나는 것 같아. 백현이 자료를 내던지고 벌렁 드러누웠다. 난 좀 쉴래. 양심없는 백현의 발언에 세훈이 어이없다는 듯 김빠진 소리를 냈다. 여기서 제일 한 거 없는 인간아, 딴청부리지말고 빨리 해. 너 어차피 조금 있으면 강의들으러 가야 되잖아. 세훈이 누워있는 백현의 앞에 노트북을 들려주었다.

 

 

"아, 뭐야."

"닥치고 빨리 찾아. 난 프리라이더 존나 싫어하거든."

 

 

세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찬열이 덧붙였다. 맞아, 변백 너 솔직히 지금까지 한 거 없잖아. 저것들이 아주 쌍으로 옆에서 쪼아대네. 백현이 무시한 채 계속 누워있자 세훈이 백현의 배를 밟았다.

"빨리 안 쳐 일어나?"


높아진 목소리에 백현이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천천히 마우스를 잡았다. 이제서야 제 말을 따르는 백현의 모습에 세훈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세훈이 찬열의 손에서 자료를 넘겨받았다.

딸각딸각, 백현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무성의하게 자료를 찾다가 잠시 오세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려 무언가를 다다닥 두드렸다. 딸깍, 엔터키를 누르자 원하던 게 나와 백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신나게 스크롤을 내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백현이 제대로 잘 조사하고 있나 노트북을 흘끗 쳐다본 찬열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어졌다. 미친, 변백현 뭐하냐. 찬열이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복장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간호사 복장, 메이드 복장, 망사스타킹, 바니걸 등등 무릇 남성들의 로망이라던 옷들이 즐비하게 떠있다.

변백현, 진지하게 자료조사를 찾고 있나 했더니만....?

뭔가를 덧붙여 쓰고있던 세훈이 찬열의 표정을 보고서 펜을 떼었다. 뭘 보는 거지? 가만히 보니까 박찬열도 변백현이 쓰고있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표정이 왜 저래? 홀린 듯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박찬열의 모습에 뭔가 이상한것을 직감한 세훈이 백현의 노트북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이는 장면들에 욕을 흘렸다. 와 미친.

 

 

"지금 장난하냐?"

 

 

세훈이 백현의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았다. 자료찾으라고 줬더니 이런거나 찾고 있어?! 백현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것도 자료의 일환인데? 개지랄을 한다. 세훈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야, 너 그냥 빨리 꺼져. 세훈이 백현을 붙잡아 일으켰다. 문앞까지 끌고간 세훈이 백현의 가방을 주워들곤 홱 던졌다. 가방을 받아든 백현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안 가도 되는데."

"닥치고 꺼지라니까, 쫌!!"

 

 

세훈이 친히 문을 열어 백현을 떠밀고 문을 닫았다. 쾅, 닫히기 직전까지 백현이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화를 식히고 제자리로 돌아온 세훈이 찬열을 노려보았다. 움찔, 매서운 세훈의 시선에 찬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문제야. 같이 보고 있었지?

 

 

"쌍으로 똑같아, 이것들이 진짜..."

 

 

세훈이 화를 냈다. 찬열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냐, 바로 말해주려고 했는데....

세훈이 성질을 냈다. 어디서 구라를 치려그래, 내가 다 봤거든. 세훈이 더 성질을 내자 찬열이 꼬리를 내렸다. 아무래도 변명은 그만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얌전히 하자...변백현이 오면 떠넘기기로 하고. 찬열이 한숨을 내뱉으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아까 백현이 저지른 파렴치한 사건 뒤로 말 한마디 없이 한 시간가량 자료를 분석하던 찬열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같은 오세훈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목이 조금 타는 것 같다.


"냉장고에 마실 거 있어?"

A4용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세훈이 대답했다. 오렌지 주스 있어.

찬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김에 나도 한 잔. 움직이는 찬열의 뒤로 세훈의 말이 날아왔다. 어디보자, 오렌지 주스, 주스.... 아 찾았다. 병을 찾은 찬열이 따라 마시고 세훈의 것도 컵에 따랐다. 자, 여기. 세훈이 찬열에게서 주스를 받아들곤 한 모금 마셨다. 많이 했어? 찬열이 어깨 너머로 세훈이 한 것을 쳐다보았다. 뭐, 어느정도. 계속 고개숙이고 있었더니 목아프다. 세훈이 다시 주스를 마셨다.

 

 

"목 아파? 주물러줄까?"

"응."

 

 

세훈이 대답했다. 세훈이 후으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찬열이 손을 들어올려 세훈을 안마해주기 시작했다. 조금 뭉쳤던 게 풀리는 것 같네. 찬열의 안마를 받으며 세훈이 생각했다. 아, 좋다. 세훈이 눈을 감았다.

세훈이 몸을 슬쩍 뒤로 기댔다. 조별과제는 진짜 암이다, 이걸 내준 교수는 그냥 암덩어리고. 잠시 눈을 감고 교수를 욕하고 있으려니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게 느껴졌다. 응? 세훈이 눈을 떴다. 박찬열이 빤히 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안마해주고 있던 손도 멈춰져 있었다. 박찬열의 차차 얼굴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입술이 맞닿았다. 어, 세훈이 눈을 깜박거렸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의 감각. 잠깐만, 이거 왠지..... 훅 풍겨오는 박찬열의 난초 향에 세훈은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띠디딕,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아 죽겠군. 백현이 재차 생각하며 오세훈의 자취방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열자 백현이 처음으로 맡았던 것은 밤꽃냄새와 방 안에 가득한 두 명분의 향기였다. 백현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널부러진 옷들.

가방을 대충 내팽겨치고 조금 안쪽을 보니 바지만 챙겨입은 채 상체는 헐벗은 박찬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레 상상이 가는 일에 백현이 눈쌀을 찌푸리며 물을 마시는 박찬열을 불렀다.

"야, 인간적으로 그냥 과제만 하고 있지 그랬냐?"

"아..."



찬열이 멍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신경질이 난 백현이 건성으로 손을 휘젓고는 세훈을 찾았다.

 


"오세훈은?"

"화장실에."

"아 진짜."

백현이 짜증을 냈다. 그리고 셔츠를 걸치려는 박찬열에게 입을 열었다. 야, 창문 좀 열어. 냄새 쩔어.

찬열이 어깨를 한 번 들썩거리고서는 창문을 열었다. 백현이 턱을 괴곤 발끝을 깔딱거렸다. 아 진짜 냄새 개쩌네. 오세훈은 왜이렇게 안나와? 백현이 화장실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 아까 나보고는 논다더니 프리라이더라느니 뭐라고 했으면서 내가 없던 동안 아주 잘 놀았겠다. 속으로 두 사람을 마구 깔아뭉개는 동안 화장실 문이 열렸다.

대충 씻고 나온 세훈은 가볍게 셔츠 하나만 입고있었다. 그것도 상의만. 백현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 안쪽에 남은 붉은 자국들, 가는 발목에 남은 억센 손자국.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은 세훈이 어느새 자취방에 있는 백현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방금 전에 왔더라."

 

 

찬열이 대신 대답했다. 백현의 시선은 여전히 오세훈에게 가있었다. 젖어있는 머리칼, 물기가 남아있는 몸. 세훈이 수건을 목에 걸었다. 절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피곤한 얼굴로 백현을 힐끔 바라보더니 쏘아붙였다.

"뭘 봐?"


그리고는 세훈이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제 속옷을 찾았다. 깔끔하게 씻고나온 세훈의 체향이 코를 깊게 찔러왔다. 유혹하는 향기, 라. 백현이 메말라오는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옷을 찾으려 주저앉은 세훈의 손목을 잡았다.

덥석, 잡힌 손목에 세훈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백현이 제 옆으로 온 건지도 몰랐다. 왜. 세훈이 짧게 물었다. 박찬열이랑 한게 얼마 되지 않아서 좀 피곤했다. 백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오세훈, 옷 입지마."

"뭐?"

 

 

세훈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백현이 싱긋 웃었다. 나, 섰어. 세훈이 눈을 내려 백현의 앞섶을 확인했다. 아 미친..... 나 지금 피곤하다고. 세훈이 약간 날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현이 세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잡아챈 세훈의 손목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뭐 어때? 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매달려있기만 하면 되는데."

백현이 저를 쳐다보는 또다른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와 오세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박찬열. 흐응. 백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자신이 한 말이 뭔지를 알아들으면서도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건가. 박찬열의 눈동자 속에 자리잡은 감정이 뭔지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너도 손해보는 일은 아니잖아? 박찬열.

 

 

"우리가 잘 예뻐해줄게, 세훈아."

 

 

의미심장한 그 말에 찬열의 눈썹이 올라갔다. 백현이 씨익 웃었다. 오세훈, 솔직히 너도 좀 지겹긴 하지? 색다른 거 해보는 거 어때. 과제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 -

진정한 3p는 이런맛이죠 신세계로 리드해주시는 백오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영고세(...) 미안해 세훈아 이런 팬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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