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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찬세] 향기의 각성 上

* 오메가버스 세계관 약간 있습니다

 

 


선택받은 사람에게는 제각기 고유한 체향이 존재한다. 피어나는 꽃처럼 보드라운 향, 시원한 바람처럼 조금 차가운 향, 이슬에 젖은 풀잎을 닮은 향 등등. 그중에서 박찬열의 향기는 강한 난초 향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의지가 굳은 느낌을 주고 찬열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향이었다. 네 향은 너를 많이 닮았어.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리며 찬열은 턱을 괴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십 개의 색다른 향기를 맡고 또 지나치면서 찬열이 느낀 것은 체향은 주인을 닮는다는 것이었다. 대개 유약한 사람들은 주인의 성격을 닮아 연약한 향을 풍겼다. 반대로 결단력이 있거나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향이 진하고 강한 느낌을 주었다. 체향은 그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반영한다, 그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굳이 말투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도 향기를 통해 어느정도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찬열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선량하게 생겼지만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검은색으로 물든 사람들이었다. 찬열은 자기 나름대로 향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갈라냈다. 너는 괜찮아, 내 영역 안에 들어와도 돼. 넌 아웃, 나를 속일 게 분명하니까. 그 때, 어디에선가 옅은 장미향이 났다. 찬열이 고개를 돌렸다.



"박찬열이지?"



이야기 많이 들었어. 정말 여자애들 여럿 후리게 생겼네.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애가 조금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을 덤덤히 소개했다. 난 오세훈. 변백현한테서 니 이야기 종종 들었어, 멍청하다며?

초면에서부터 막말을 하는 세훈의 모습에 찬열이 조금 당황했다. 뭐라 반응해야될지도 몰랐다. 그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세훈이 가방을 내려놓곤 찬열의 옆자리에 앉았다.

"앉아도 되지? 수업 같이 들을 사람이 없어서 곤란했거든."

세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할말을 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얼떨떨했지만 세훈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고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찬열이 질문을 던졌다. 너도 이거 들어? 왜? 우리 전공수업도 아닌데.

"변백현이 듣는 줄 신청했더니 안 듣는다고 하더라고. 나쁜 새끼, 괜히 신나서 신청했잖아."

세훈이 이를 뿌득 갈았다. 찬열이 세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훈은 제 이야기를 구구절절 처음보는 박찬열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마 박찬열도 이 강의 들을 거라고, 가서 같이 앉으면 어떠냐고 해서,



"이렇게 앉게 된 거지."

"아."



세훈이 싱긋 웃었다. 괜찮지? 혹시 같이 앉을 사람 있었어?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그럼 잘됐네.

세훈이 편하게 턱을 괴었다. 예전부터 궁금했긴 했거든, 변백현이 그렇게 말하는 박찬열이 누군지. 생긴 거랑 다르게 멍청하다고 해서 신기했고.찬열이 입술을 비죽 올렸다.


"멍청이라고 계속 말하면, 별로 기분좋지는 않은데."

"아, 미안."

세훈이 사과했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또 새침하게 웃었다. 어쨌든, 같이 잘 살아남아보자, 친구.

세훈이 팔을 베고 옆으로 엎드린 채 찬열을 보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그래. 찬열이 멍하게 대답하고서는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쿵덕쿵덕,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순간적으로 세훈이 너무 예뻐보인 탓이다. 후, 변백현. 찬열이 속으로 오랜 친구를 원망했다. 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얘를 보낸 거야..... 이 강의, 학점 잘 나올 수 있을까. 찬열이 진지하게 생각했다.


*


"아, 저리 좀 꺼져봐."



세훈이 들이대는 백현을 밀어내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킁킁거리지 마! 음식 더러워져. 가서 자리에나 앉아있어. 

가라고 했음에도 가지 않는 백현에게 짜증지수가 최대로 치솟은 세훈이 거실에 늘어져있는 찬열을 불렀다.

"야, 박찬열!! 변백현 좀 끌고가!!"

찬열이 자리에서 밍기적 밍기적 일어나 세훈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음식 앞에서 도무지 움직이지 않으려는 백현을 억지로 끌고가 탁자 앞에 앉힌 찬열이 세훈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강의실에서 오세훈을 처음 만나게 된 후로 1년이 지났다. 첫인상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찬열은 곧 세훈과 빠르게 친해졌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에 화난 둘은 밤새도록 분노로 가득찬 카톡을 하기도 했고, 같이 수업을 빼먹고 다른 곳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백현이 입을 열었다. 음, 또라이들끼리 잘 노는 것 같네. 세훈이 무덤덤하게 일격을 날렸다.

글쎄,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서 제일 또라이인 놈은 너 아니냐?



세훈이 김치찌개를 들고 와선 탁자에 내려놓았다. 오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끈한 열기와 더불어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백현이 탄성을 질렀다. 식충이들. 세훈이 수저로 마구 찌개를 퍼대는 백현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작 난 별로 안먹는데, 너네들이 내 자취방을 거덜내고 있어."

쯧쯧거리던 세훈도 수저로 찌개를 퍼담았다.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는것에만 집중하던 백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진짜 오세훈이 여자였으면 당장 결혼하는 건데."

"개소리야."

"아니면 최소한 오메가였더라면."



백현이 짖궂게 웃었다. 억지로 임신하게 만든 다음에 내가 책임질 수도 있었는데. 세훈이 수저로 세게 백현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자꾸 개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쳐먹어."

찬열이 백현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맞았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백현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얼굴도 봐줄 만하고. 그런데 뭐, 나는 같은 계열은 절대 사양하는 쪽이거든. 백현이 힘있게 말했다. 그렇지 않냐 박찬열? 백현이 찬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오세훈 처음에 오메간줄 알았거든."

물론 생긴 건 존나 상알파처럼 생겨먹었지만, 향기가 없잖아 향기가. 그리고 눈웃음 지을 때 흰둥이처럼 변하는 거 보면 오메가 같기도 했고. 하는 짓도 존나 소녀잖아, 소녀. 변백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좀 닥쳐."

"네네, 공주님."



백현이 이죽거렸다. 세훈이 날이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너는 다음부터 와도 절대 밥 안 줄줄 알아. 내가 니 식모인줄 알아? 

찬열이 백현과 세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파의 특정상 다른 오메가들을 단번에 휘어잡을 만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오세훈은 집중하지 않으면 맡지 못할 만큼 미약한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세훈의 향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희미했다. 사람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알파들은 향이 강하고 진한 편이었고, 오메가들은 부드럽고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찬열은 세훈이 지금까지 오메가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베타, 즉 일반사람들은 향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만일 오세훈이 한 사람과 오래 붙어있으면 그 사람의 향이 세훈에게 달라붙었다. 따라서 찬열은 세훈에게 붙어온 향을 맡고 세훈이 그 전에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너 약 먹는거 안 불편해?

언젠가 찬열이 세훈에게 물었다. 무슨 약? 찬열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히트사이클 억제하는 약. 세훈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걸 왜 물어봐? 세훈이 겉옷을 입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너 오메가 아니야?

찬열의 말에 세훈이 인상을 구겼다. 내가 오메가였으면 왜 알파인 니들이랑 같이 다녔겠어?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세훈이 못박았다. 난 알파야. 열성 알파지만.



찬열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백현의 말대로, 오메가였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세훈과의 사이가 더 발전될 수도 있을 일이었는데. 못된 생각이지만 히트사이클을 억제하는 약을 숨겨서, 세훈이 불안정한 상태로 절 붙들고 매달리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니다. 오세훈과 자신의 사이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희미한 장미향, 세훈의 향기가 다른 사람의 향기를 매달고 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괴로웠다. 저 향기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오세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친구사이로만 남아있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찬열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


"윽....."



술잔을 내려놓은 세훈이 입을 막았다. 시끄러운 술집 안. 친한 동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죽고 죽어라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찬열이 표정이 안좋아진 세훈을 보고선 등을 두드려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속 많이 안좋아?"

세훈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한 텀 뒤에 대답했다. 조금, 그렇게 심한 건 아니야.

오세훈 또 뺀다. 무리중에서 하나가 야유를 보냈다. 너 몇 잔 마시지도 않았잖아, 왜 아픈 척 하냐. 세훈이 말을 한 본인을 노려보았다. 그 사이에 술이 또 돌려졌다.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건지, 맥주의 소주를 1:1의 비율로 탄 잔이 찬열에게 건네졌다.


이것들이 오늘 죽을려고 작정했구만. 찬열이 술잔을 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세훈에게 가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오세훈. 속이 많이 안좋은건지 머뭇거리다가 좀 전의 쓴소리를 받아서였던건지 건네진 술잔을 받아든다. 괜찮을까. 그만 마시라고 하고 싶은데, 오세훈 성격에 들을 리가 없었다. 찬열이 쓴웃음을 지으며 친구들을 따라 건배를 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알코올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번에 다 들이킨 찬열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입을 가리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세훈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무리였나 보다. 찬열이 친구들을 뒤로 하고 세훈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 우윽, -"



변기를 잡고 세훈이 먹었던 것을 다 게워내려고 했다. 속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요새들어 계속 기운이 없고,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도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술자리도 나오지 않을려고 했는데 할 수 없이 나온 거였다. 괜히 나왔다는 걸 세훈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자취방에서 잠이나 자고 있을걸.

아무리 토악질을 해봐도 메슥거릴 뿐 나오지 않는다. 세훈이 손을 제 목구멍 안에 집어넣고 긁었다. 욱, 세훈이 먹었던 것을 토해냈다. 목이 아프다. 누가 등을 도닥거려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토해낼 수 있었다. 모든 걸 게워낸 세훈이 입을 대충 닦고서는 물을 내렸다. 뒤를 돌아보니 절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박찬열이 보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세훈이 비척거리며 세면대로 가서 입을 헹궈냈다. 쏴아아, 떨어지는 물소리 사이로 세훈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수도꼭지를 잠근 세훈이 찬열을 돌아보았다. 그만 갈래? 찬열이 물었다. 힘들었는지 세훈의 빨개진 눈가가 들어왔다.



"집가고 싶어.."



세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너무 힘들어, 갈래. 세훈이 찬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남아있을 거야? 라고 묻는 듯한 눈빛. 잠시동안 찬열을 바라보던 세훈이 발을 돌려 화장실을 나갔다.

아, 머리가 어지럽다. 약간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감기 걸렸나.

찬열의 시선이 세훈의 뒤를 쫓아갔다.


*


"점심은?"

찬열이 도통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세훈에게 물었다. 세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먹을래. 속 안좋아. 그 말에 찬열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았다. 오세훈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비실거리고 있었다. 병든 병아리처럼.

"요새 왜그래? 병원은 가봤어?"

"아니....할 게 너무 많아서."

세훈이 한숨을 쉬었다. 그냥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거 같으니까, 시험기간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

찬열이 세훈의 말을 듣고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이게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가잖아. 찬열이 세훈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너 전보다 더 말랐어, 제대로 먹지도 않으니까 살이 빠지지. 그렇게 안먹고 하면 더 스트레스 받는다. 세훈이 찬열의 팔에서 제 손목을 뺐다. 싫어, 먹으면 체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냥 안 먹는게 나아. 마실건 괜찮더라. 세훈이 천천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좀만 자다가 갈게. 이따 강의실에서 봐."

"정말 괜찮겠어?"

"자면 괜찮아지겠지, 뭐. 아 맞다."

 

 

세훈이 문득 생각난 듯이 찬열을 불렀다. 너, 트롤이 내준 과제 했어?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시험 전에 내주는 건 아니지, 그 교수님 내가 생각했을 때 좀 많이 아닌 것 같아. 세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거 오늘 같이 하자."

"오늘?"

찬열이 되물었다. 세훈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대답했다. 다음주에 시험이니까 공부하려면 그냥 오늘 밤 새서 끝내지 뭐....

세훈이 고개를 옆으로 두어 번 꺾고선 덧붙였다.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스트레스의 근원인 그 과제를 끝낸다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세훈이 머리를 짚었다. 아, 죽을 것 같다. 머리가 계속 멍하고 이제는 눈앞도 흐려져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세훈이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삐뚤삐뚤하게 쓰여지는 글씨. 남은 건 아직도 A4페이지 세 장. 벌써 12시가 넘어서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아직 본격적인 시험기간이 아니었기에 경상대 휴게실은 찬열과 세훈을 제외하고서는 텅 비어 있었다.

한시까지 다 끝낼 수 있을까. 문이 닫히는 시간을 생각하던 세훈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훈아, 세훈아.

꿈속에서 말하는 듯 누군가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세훈."

"ㅇ, 어..... 왜?"

 

 

제 팔을 가볍게 흔들고 있는 사람은 박찬열이었다. 세훈이 인상을 잔뜩 쓰고서는 물었다. 왜 불렀어. 기어들어가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내면서 세훈이 물었다. 찬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너 많이 힘들어보여. 그만하고, 내일 하자."

찬열이 들고있는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훈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냐, 싫어. 그만하자니까. 찬열이 억지를 쓰는 세훈의 말을 무시하고선 책을 덮었다. 야! 세훈이 책을 집어넣으려는 찬열의 손을 저지하고서는 말했다. 오늘 다 끝내, 내일까지 질질 끌고가는 건 더 싫어. 차라리 오늘 죽고 말지.

극단적인 세훈의 말에 찬열이 어이없는 웃음을 뱉었다. 너 오늘 컨디션도 별로 안좋잖아. 세훈이 억지를 썼다. 안 돼, 오늘 끝내고 푹 잘거야. 내일은 오후 수업이니까. 시름시름 앓는 세훈을 보던 찬열이 결국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30분만 더 하는 거다? 못 끝내면 그건 나중에 하고."

 

 

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사다줄까? 안색이 너무 안좋은 세훈을 바라보고 찬열이 물었다. 세훈이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찬열이 다급하게 물었다. 세훈이 지갑을 챙기며 대답했다.

"내가 사가지고 올게, 그러면서 바람도 좀 쐬고 올 테니까."


그동안 너 혼자 하고있어.


찬열이 문을 열고 휴게실을 나가는 세훈을 바라보았다. 불안정한 향기, 금방이라도 팍 하고 터져버릴 듯 위태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향을 맡아왔지만, 그 중에서 이런 느낌을 주는 걸 맡은 기억이 있었나? 찬열이 기억을 더듬었다. 요새 들어 자주 피곤하고 힘들다는 오세훈을 지켜보아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세훈의 장미향도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조금 이상했지만 뭐 그럴수도 있겠거니 하고 애써 걱정을 억눌렀다. 제가 다가가려 하면 세훈은 손을 내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상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찬열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결국, 찬열은 펜을 내려놓고 서둘러 세훈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ㅎ...윽..."

 

 

온몸이 타버릴 듯이 뜨겁다. 아, 누가, 좀. 세훈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세훈이 손끝으로 사물함을 긁었다. 바드드득, 소름끼치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의 정적을 깼다. 제대로 몸을 못 가누는 세훈의 옆에는 음료수 캔 두개가 굴러다녔다. 저도 모르게 친 캔이 도르르 굴러가 저 벽 끝에 부딪혔다.

죽을 것 같아, 몸이 뜨거워...

흐윽, 세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껏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다. 알고 싶지 않은 뭔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는 기분. 돌아가야 되는데, 돌아가야 되는데. 사고가 정지해버린 두뇌가 같은 생각만을 반복했다.

누가 좀, 날 도와줬으면.

 

세훈이 사물함을 붙잡고 일어서려 하다가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제 의지를 배신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은 흐릿해지고 후각과 청각만이 또렷해졌다. 누군가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 아... 세훈이 신음을 내뱉었다.

 

 

"오세훈!"

 

 

복도 끝에 쓰러져있는 세훈을 보고 찬열이 재빨리 달려갔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이마, 풀려버린 눈. 그리고 코 끝을 찌르는 지독한 장미 향기. 어두운 복도를 가득 메운 강렬한 장미향에 찬열이 숨을 멈추었다. 그저 향기만 짙어진 것이 아니다. 이 향기는.... 찬열이 세훈을 바라보았다.

 


"박...찬열."

세훈이 띄엄띄엄 말을 내뱉었다. 지겨울정도로 많이 맡아본 난초 향인데, 그저 박찬열을 닮았다 생각만 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이성이 마비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세훈이 찬열의 팔을 잡았다. 본능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박찬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냥 그랬다, 박찬열이라고. 세훈이 찬열을 불렀다.

"나,좀,살려,줘. 도와줘, 제발...."

세훈이 찬열의 팔을 좀 더 세게 잡았다.

 

훅 풍겨오는 장미향에 정신이 아찔하다. 지금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세훈의 얼굴이 무기력하고 또 그만큼 성욕을 자극했다. 찬열이 세훈에게 손을 뻗으려다 잠시 멈추었다. 지금 자신은 막 갈림길에 놓여있었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서 오세훈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친구로 남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면 앞으로는 오세훈을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열아...."

 

 

애원하는 세훈의 목소리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건 어쩌면 그동안 남몰래 빌었던 제 소원이 정말로 실현된걸지도 몰랐다. 알파라는 오세훈이 왜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을 겪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찬열이 손을 뻗어 세훈의 양 볼을 붙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

찬열이 세훈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다른 손은 세훈의 옷 안으로 집어넣어 살결을 어루만졌다. 말라서 도드라진 척추를 하나 하나 짚고 내려갔다. 더 밑으로. 찬열이 고개를 틀어 혀를 깊숙히 집어넣었다. 제 목에 팔을 두르는 세훈의 온기가 느껴졌다. 흐, 찬열의 손이 허리 밑으로 내려가자 세훈이 신음을 내뱉었지만 그 신음소리는 입술에 막혀서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미칠 것 같다.

찬열이 세훈의 다리를 들어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제 눈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오세훈, 그리고 그런 세훈을 이끄는 자신. 눈에는 오직 오세훈의 얼굴이 보였고, 귀에는 제 이름을 부르는 세훈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찬열이 더 깊숙히 파고들자 세훈이 허리를 비틀며 달뜬 신음소리를 흘려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려퍼지는 울음섞인 신음소리를 들으며, 찬열이 가만히 생각했다.

장미향이 내 코를 마비시키는 것 같아, 세훈아. 내가 널 안았으니, 이제 네 향기도 나를 닮아갔으면.

 

*

 

"흠."

 

 

백현이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쉬는시간을 틈타 편한 얼굴로 잠든 오세훈의 얼굴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빌빌거리드만, 이제는 나아졌나 보군. 백현이 싱겁게 생각했다. 심심한데 게임이나 할까. 백현이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고 게임창을 띄웠다. 그런데 이 시간 앞에 오세훈이 박찬열이랑 강의듣고 온 건가?

세훈의 몸에 박찬열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있다. 그러고보니 한없이 희미했던 세훈의 체향도 갑자기 진해진 것 같긴 한데. 백현이 게임이 로딩되는 동안 자고있는 세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게임이 시작하자, 미련없이 세훈에게서 시선을 떼고서는 게임에 집중했다. 



 

- -

리네이밍 글이에욘.... 전에 어디서 본 적 있으면 살짝 잊어주시길ㅠㅠㅠㅠ

향기의 각성은 상, 중, 하 총 3편으로 찬세-백세-찬세백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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