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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백세] 오색빛 사진첩

⁠* 150522 백세 전력 참가글입니다

 

 

 

활짝 열린 베란다 사이로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세훈은 익숙하게 몸을 돌려 집 안을 돌아다녔다. 남자만 사는 집이라 이렇게 하루정도 날 잡고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구석은 먼지투성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빨랫감을 모아 대충 세탁기 안에 던져 두고 버튼을 누른 세훈은 세탁기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세탁실을 나왔다.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음료수 잔을 들어 씽크대 안에 넣어두고, 방으로 가서 이부자리도 정돈했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책상 맨 윗칸, 먼지에 쌓여있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보고선 눈쌀을 찌푸렸다. 오늘에야말로 정리해두리라. 그렇게 다짐한 세훈은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받침대로 쌓고 올라가서는 책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책을 내려놓아도 그 뒤에 있는 책들이 계속 나와서 마치 도라에몽의 신기한 가방이라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려던 참이었다. 스프링으로 분철되어 있는 묵직한 무언가가 드러났지만 손이 잘 닿지가 않았다. 손을 좀 더 뻗은 세훈이 마침내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먼지투성이인 묵직한 사진첩이었다. 이게 뭐지, 하고 검은색 표지를 넘긴 세훈은 그제서야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 있었구나."

사진첩 안에 있는 사진들은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때의 세훈의 모습이었다. 환하게 웃는 세훈과, 그 옆에서 더 환하게 웃고 있는 백현. 추억에 잠긴 세훈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사진첩을 천천히 넘기며 그 사진을 찍었던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노란빛 추억

"너 무슨 향수 써?"


아까부터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백현이 결국 입을 열었다. 공강이 남아서 할 짓도 없으니 동방에서 시간이나 죽일까, 라며 앉아있던 세훈은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 세훈이 되물었다.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느라 잘 못들은 탓이었다. 세훈의 말에도 백현은 짜증내지 않은 채 다시 답해주었다. 향수, 뭐 쓰냐고. 백현의 질문에 세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 향수 안 쓰는데요."

"어?"

"향수 안 뿌려요, 저."

연이은 세훈의 말에도 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훈의 대답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아니라고 친철하게 답했음에도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렸지만 다 대답했다고 판단한 세훈이 다시 고개를 핸드폰으로 쳐박았다.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던 백현이 세훈의 목 바로 뒤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아닌데, 맞는데. 갑작스러운 백현의 행동에 세훈의 어깨가 조금 움칠했지만 백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동안 냄새를 맡던 백현이 아, 하는 말을 흘리고 세훈의 목에서 얼굴을 뗐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신입생이지? 저번에 술자리에서 봤던 것 같은데, 미안. 내가 그때 좀 많이 취했어서 애들 이름을 기억 못한다.

백현이 멋쩍게 웃으며 물어왔다. 세훈은 조금 떨리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세훈이요, 오세훈.


분홍빛 추억

"그래, 내 코는 잘못되지 않았다니까."

"역시 개 코, 개코. 그 조그만 걸 어떻게 골라냈대, 오이인줄도 모르겠다."

찬열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볶음밥에서 오이만을 싹싹 골라낸 백현의 말에 동조했다. 진짜 쟤 신기하지 않냐 세훈아? 변백현 코 정도면 솔직히 마약탐지견 대신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이 세훈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겼다.

"아야! 왜 때려요!"

"야, 인간적으로 넌 박찬열 말에 동조해주면 안 되지."

"맞는 말이구만 왜 세훈이한테 그러냐."

애 아프게. 찬열이 세훈이 맞은 곳에 입김을 호호 불어주는 시늉을 하자 백현이 다시 주먹을 들어올린다. 너 계속 해봐, 그러다 죽어 그냥. 백현의 협박에 찬열이 더러워서 안 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떨어진다. 밥 먹는데 때리고 난리야. 세훈이 비죽 날 선 눈으로 백현을 쏘아보고 있자 백현이 그 눈빛을 눈치채고는 강아지같이 웃으며 세훈의 머리칼을 있는 힘껏 헝클어뜨렸다.

"미안미안, 아팠어 우리 애기?"

"넌 좀 그 우리 애기 소리는 집어치우면 안 되냐."

진심으로 토나올것 같다는 표정으로 찬열이 백현에게 내뱉었다. 그런 찬열의 말에도 백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최소 양봉업자는 될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로 계속 쳐다보는 백현의 시선에 왠지 세훈은 간지러워져 고개를 돌렸다. 세훈이 도로 밥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예 백현은 턱을 괸 채 세훈이 밥 먹는 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던 찬열이 그런 백현을 보고서 툭 내뱉었다.

"너네 하는거 보면 사귄다고 해도 믿겠다."

"어?"

"아니, 그냥 사겨라 사겨. 짜증나니까 사귀어버려."

"그래버릴까?"

백현이 좋아라 웃는다. 정말 그래버릴까, 세훈아?

뚜렷하게 말해오는 백현의 말에 세훈은 아무 말 없이 입 안에 남아있던 밥을 오래오래 씹었다. 찬열은 그런 두 사람의 꼴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어휴 커플들도 저렇게는 안 하겠다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내가 너네들을 식장으로 보내버려야겠다.


푸른빛 추억

시원하게 반짝이는 바다가 더위를 피해 찾아온 피서객들을 반겼다. 남들이 다 가는 해운대 같은 곳은 물이 더럽고 식상해서 싫다며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던 중, 꽤 한적한 바다를 발견한 그들은 신나서 물놀이를 즐겼다. 수영복따위 입는 것은 귀찮아서 안 한다며, 흰 티와 검은 바지를 입은 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해안가를 누볐다. 한 사람을 타겟으로 해서 바다에 던지고 낄낄대고 있으려면, 그 낄낄대는 사람을 뒤이은 타겟으로 잡아 다시 빠뜨리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좀 흐른 뒤로는 물에 젖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젊어서 체력이 넘치는지 두 시간을 미친듯이 뛰놀던 무리는 그제서야 좀 지치는지 다들 발을 질질 끌며 파라솔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아, 저리 꺼져."

"너가 꺼져. 힘들어 뒤지겠네..."

좁은 파라솔 안에서도 자리를 잡겠다고 아옹다옹하던 와중에도 백현은 먼저 자리를 선점한 자의 여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훈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백현이 저 새끼들 병신짓하는 거 보라며 낄낄거렸다. 주변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노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세훈은 숨을 고르며 목을 슬쩍 뒤로 젖혔다. 아무래도 체력이 거덜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볼에 차가운 물통이 닿아와 세훈이 화들짝 고개를 바로하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자신에게 얼음물을 건네는 백현이었다.


"마셔."

"아, 고마워요 형."

안 그래도 목이 말라왔던 참에 다가온 얼음물을 거절한 이유는 없던 세훈이 백현이 건네준 물통을 받아들고서는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한 물이 들어오자 체력이 약간 회복되는 것 같기도 했다. 백현에게 물통을 도로 돌려주자 받아든 백현이 혀를 쯧쯧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체력이 약해서야 되겠어?"

그 말에 세훈이 눈을 쭉 찢으며 백현을 내려다봤지만 정작 그런 말을 꺼낸 백현은 더 무기력해 보였다. 세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에는 저보다 형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세훈이의 받아침에 백현에 다리를 흔들며 대충 흘러넘겼다. 그게 또 웃겨서 세훈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여행의 장식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바베큐 파티였다. 여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남자들만의 모임이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넘긴 그들은 신나서 고기를 구워댔다. 양파, 소세지도 굽자. 야 고기 그냥 한번에 다 구워버려!

그리고 자연스레 술잔도 오가게 되었다. 한 잔 두잔, 술잔이 채워지고 가득 차 있던 병이 비워질 때까지 그들은 쉬지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런 날에 빼기 없다, 알아서들 해라 라며 제일 나이많은 형이 눈알을 부라리기도 전에 흥이 오른 그들은 자발적으로 술을 비웠다. 세훈은 잔을 내려놓았다. 술기운이 도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알딸딸했다. 여기서 한잔만 더 마시면 골로 갈 것 같아 세훈은 잠시 술 깨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세훈을 본 백현은 고기나 좀 더 가져오겠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탁탁. 뒤에서 뛰어오는 발자국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았기에 세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백현이 제 어깨를 잡아채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괜찮냐?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걱정해주는 목소리에 세훈은 갑자기 울컥 울 것만 알았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재밌게 즐기면서 마셨고, 오늘 하루 노는 내내 기분이 안좋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냥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세훈이 우두커니 선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자신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하는 세훈이 이상했던건지 백현이 고개를 쭉 내밀어 세훈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난데없이 우는 세훈에 당황한 듯 야, 야 갑자기 왜 그래 하며 허둥댔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세훈아......응?"

뭐라고 물어도 입은 꾹 다물고 있고, 눈물은 계속 떨어뜨리고 있는 세훈을 보며 백현이 쩔쩔맸다. 고운 손을 들어올려 세훈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그럴수록 세훈은 더 많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백현은 세훈이 우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세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없는 사이에 우는 세훈을 달래주며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백현은 세훈의 우는 얼굴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주홍빛 불에 반사된 눈물이 바치 보석처럼 흘러내렸다. 울음을 참는 듯한 입술은 파르르 떨려서, 한 송이 꽃처럼 가냘퍼 보였다. 백현은 저도 모르게 세훈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같이 세훈의 눈물이 멈췄다.

하얀빛 추억

세훈은 자신이 동방에 들어오자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현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백현이 저를 피한지 2주 째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행 후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백현이 자신에게 입을 맞춘 후로. 세훈은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만 되어서는 안 됐다. 이렇게 계속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무시당하면 안 됐다. 오늘은 꼭 백현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왜 자신을 피해다니냐고, 왜 그때 자신에게 키스했느냐고. 세훈은 제 옆을 지나치려는 백현의 파를 붙들었다. 설마 세훈이 자신을 붙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백현은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백현이 형."


세훈이 백현을 불렀다. 백현의 두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잠시 시간좀 내줘요."

세훈의 말에, 백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방에서 나와 백현과 한적한 건물 뒤편으로 간 세훈은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제 시선을 피하고 있는 백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세훈은 그저 주먹을 쥔 손을 폈다 쥐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백현은 발 끝으로 잡초를 지그시 밟았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을, 전공책을 들고 바쁘게 걸어가던 한 여자가 흘끗 바라보고는 지나쳤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세훈이 입을 떼었다.

"형."

"...."

"왜 나 피해요?"

"......"

백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세훈이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형."

"....."

"백현이 형."

"...응."

"왜...왜 그때..."

세훈은 메이려는 목을 가다듬었다. 왜, 그때..

"저한테 키스했어요?"

세훈의 질문에 백현의 발장난이 멈추었다. 백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세훈은 백현에게서 나올 답을 기다렸다. 그 어떤 말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장난이다, 술김이었다, 등등. 조금 쓰겠지만 그래 하며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세훈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백현이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백현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세훈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백현의 얼굴은 온갖 심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절절하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고, 보는 사람의 가슴이 아릴 듯한 표정이었다. 주먹진 세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백현이 세훈을 바라보며, 절절한 목소리로, 하지만 명확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만.."

"....."

"한 번만...더 키스해도 돼?"

그래도 돼? 울음섞인 목소리였다.



 

 

 

지이이잉, 갑작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에 세훈이 방금전까지 넘기고 있던 사진첩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세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화를 받은 세훈이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뭐하고 있었냐고요? 별거 안 하고 있었는데. 청소하다가 예전 사진첩 봐서. 아..응, 좋아요. 그럼 오늘 빨리 오겠네? 오랜만에 나가서 먹죠 뭐.

"이따 끝나면 연락해요, 백현이 형."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쪽 소리에 세훈이 좋아라 웃었다. 징그럽게 왜 이래 이 형. 아무튼, 알았어요. 힘내요!

전화가 끊기자 세훈은 조금 전보다 가벼워진 몸놀림으로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액정 사이로 세훈의 핸드폰 잠금화면이 살짝 비춰졌다.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백현과 그 옆에서 더 행복해하는 세훈.

 

 

- -

시간이 너무 짧다...8ㅅ8

제목대로 다섯가지의 짤막한 에피소드를 쓰고 싶었지만 시간상 4개에서 그치는걸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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